essays in love -alain de botton by scully_jy

Essays in love by Alain de Botton



번역판 제목 :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양해의 말씀- review라기엔 말도 안 되게 두서 없는 글임. 자동기술법을 차용하였으니 정신 산만해 질수도 있음을 각오하고 읽길 바람.

Relationships-내가 정의하는 남녀관계
결혼을 전제하지 않은 남녀관계란? - 성욕과 호기심이 팔할인 , 섹스가 종착지점인 허무한 감정의 롤러코스터  
결혼을 염두에 둔 관계로 전환되는 순간부터 혹은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만난 관계는? - 기회비용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부추기는 확신에 대한 갈증과 적당한 체념이 버무려진 안정감
결혼 후의 남녀관계? -음...  Pacta sunt servanda(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법언) 킥

About what is called 'love'
싸이에서 난무하는 사랑이 어쩌고 하는 글들. 뽀삽질 된 사진에, 실눈을 뜨지 않으면 알아 볼 수도 없는 글씨체로 삼십초 분량의 스크롤 압박을 참아가며 읽을 수 밖에 없는 (읽으려고 마음 먹은 경우에만 , 물론) 말랑말랑한 글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첫째, 도대체 누가 이 엄청난 창의력을 이런 데다 낭비하는 것일까, 둘째, 이런 거 긁어 모으는 사람들, 사랑 타령 지겹지 않나, 셋째, 그래 아직 저런 소리할 수 있는 거 보면 분명 초딩일테지... blah blah blah
엄밀히 말하면 사랑은 세 분류로 나뉜다. 에로스적 사랑, 플라토닉한 사랑, 아가페적 사랑. 그렇지만 아가페나 플라토닉을 노래하는 딴따라나 글쟁이는 없다.(절대 비하의 뜻은 없다. 애정과 존경을 담은 , 문학적 표현일 뿐 ) 아 물론 거의 없다는 말이다. 왜 다들 에로스적 사랑에 집착하는 걸까.
미시적인 관점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늘날의 미디어를 스크린 해 보면 결국 그 소비주체의 중심인 20대에서 40대의 남녀는 거시적으로는 평생 짝짓기 상대를 잘 만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쏟는 짐승으로 비춰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려 미디어 비평씩이나 하려는 게 아니다. 드라마도 영화도 대중가요도 하나같이 사랑 일색인 것이 어쩐지 못마땅한 것 뿐이다.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그려지는 사랑과 사랑과 전쟁에서 그려지는 사랑 사이의 간극은 또 뭐며, 토크쇼에 연예인을 초대해 놓고 하는 질문이란게 고작 대시해 온 연예인이 있었다 없었다 예스 노 팻말을 들어주세요인건 또 뭔지. 왜. 우리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mating에 .coupling에 . 집착하는 것일까... 니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게 뭔데. 

사진출처-구글 검색

The mechanism of seducing followed by falling for the seducer 
사랑이라는 것은 유혹과 굴복의 메카니즘으로 설명될 때 차라리 명쾌하다. 시쳇말로 작업하는 쪽과 넘어 오는 쪽은 필요적 공범이자 대향범이라는 말씀. 유혹과 끌림에 관한 botton의 통찰력은 놀랍다. 


It is one of the ironies of love that it is easiest confidently to seduce those to whom we are least attracted. My feelings  for Chloe meant I lost my own worthiness. Who could I be  next to her


......When we look at someone (an angel) from position of  unrequited love and imagine the pleasure that being in  heaven  with them might bring us, we are prone to overlook a significant  danger: how  soon their  attractions might pale if they began to love us back.  



......There is usually a Marxist moment in every relationship, the moment when it becomes clear that love is reciprocated. The way it is resolved depends on the balance between  self-love and self-hatred. If self-hatred gains the upper hand,  then the one who has received love will declare that the beloved  (on some excuse or other) is not good enough for them (not good enough by virtue of associating with no-goods). But if self-love gains the upper hand, both partners may accept  that seeing their love reciprocated is not proof of how low  the beloved is, but of how lovable they have themselves turned  out to be.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사람들이 설정하는 사랑의 경계는 관계의 어느 단계까지 유효한걸까. 유혹과 끌림 , 그에 따른 배타적 관계 설정이라는 하나의 공동 목적 달성을 위해 함께 질주하던 감정의 스펙터클은 둘의 관계가 배타성을 띠게 되는 그 순간부터 긴장의 이완을 맞게 되고, 죽 끝이라는 내리막길을 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각자가 서로에게서 기대했던, 혹은 연애 그 자체에서 기대했던 바들을 달성하고 나면 결국 껍데기 뿐인 상대와 연애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 시간과 기억을 각자의 버전으로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는 것은 아니냔 말이다.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해 동원하던 인연의 온갖 경이로운 기적은 , 욕망의 아찔한 향기가 사라지고 난 후에는, 확률적 사건에 불과하던 건조한 우연의 연속을 종교처럼 신봉하던 자신을 비웃는 칼끝이 되어 역시나 종교처럼 신봉하던 추억들을 가뿐히 , 기꺼이 난도질한다. 이것도 길게 보면 사랑이란 스펙트럼의 연속선상에 있는 걸까. 우리는 그러고도 다시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니 말이다. 



You can't be safe and be in love at the same time , babe...um... if such is what we call love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극히 Marxism적인, 혁신적인 형태의 사랑 이야기는 안 팔린다. 노래든 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우리는 끊임없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형태의 즉 win win의 관계를 상정해 놓고 , 결코 그리 될 수 없는 현실을 격상시키려 무단히도 노력한다. 이상향과 현실이 잠깐이라도 일치하는 순간을 두고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택의 폭은 좁다. 지극히 좁다. 우리의 연애는 이상과 현실의 일치도가 1%이냐 80%이냐의 차이에 불과할 뿐 궁극적으로는 욕망함과 욕망의 충족과 불충족, 그리고 욕망함의 포기가 명멸하는 시간의 흐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욕망하지 않으면 자아가 깨지는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는 있지만 욕망의 충족은 결코 경험할 수 없고 반면 지옥보다 달콤한 욕망의 충족을 맛보기 위해서는 욕망의 불충족과 욕망함 그 자체의 원치 않는 포기는 감수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그냥... 게임이다. 사랑게임. 승자는 없고 패자만 가득한 치명적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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